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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남해여행

2011년 2월 14일, 처음으로 저도 Y고 교무여행을 함께 떠났어요.

1박 2일 국내여행에 기내용 트렁크가 웬 것이냐고 두고 두고 저를 놀리는 분이 계셨지만 사실 속셈이 따로 있었답니다.

여가만 생기면 방방곡곡을 누비던 제가 몇 년간 여행다운 여행을 못했기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간 김에 혼자 떨어져 며칠 더 돌아다닐 생각이었거든요.

그러려니 짐을 더 챙겼어야 하고 겨울이라 부피가 커진 거였지요.

여럿이 떠나는 여행은 목적지에서의 관광도 물론 큰 의미가 있지만, 오가는 길에 나누는 정담의 즐거움이나 맛집을 만났을 때의 유쾌함 같은 것도 빼놓을 수가 없지요.

말발이라면 거의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들이어서 신변잡기 성격의 얘기만으로도 콘티에 의한 개그 못지않았고, 입수한 정보로 혹은 직감으로 들어간 식당마다 성공이어서 오감이 뿌듯했어요.

저렴한 가격에 풍성한 회접시로 저녁이 흐뭇했고, 날 것이랑 친하지 않은 저도 젓가락질을 꾸준히 할 정도로 선어는 싱싱했어요.

저야 회맛을 잘 모르니 새빨간 초고추장에 돌돌 말아 소주에 미끄럼을 태워 넘겼지만...^^

숙소로 돌아와서도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저는 작정한대로 커밍아웃(?)을 했고 서로의 고민이 자연스레 오가다가 화제가 신앙 쪽으로 옮겨갔어요.

퇴임 후에 선생님 부부가 성당에서 소공동체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건 블로그를 통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ME모임 등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주시더군요.

그 가운데, 불쾌하게 생각지 말고 들어달라는 조심스러움과 함께 겸손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위엄 있게.

“수놓는 것이 곧 종교는 아니다.”

그 순간 뭐랄까, 섬광 같은 것이 스치면서 뇌리에 박히더군요.

십자수 경력은 10년도 넘었지만 전에는 드문드문 취미 삼아 하는 정도였고, 명화에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수틀을 끼고 산 건 3년쯤 되었는데 그간 제법 많은 부분에서 위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아쉬운 것이 있었거든요.

정신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십자수 말고도 요가, 기수련, 서예 등등 아주 많지요.

그런데 종교는 정신수양 그 너머의 것, 그러니까 불교의 윤회나 기독교의 영생 같은 성격을 띠어야 하는 거고,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서 참 신앙인이 된다고 할 수 있잖아요.

이후에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고 하느님께 다가서게 되었으니 그날 던져주신 짧은 문장 하나가 제 마음에 떨어진 하나의 밀알이었어요.

다음 날 금산 보리암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의 풍광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저 자그마한 섬 하나 하나도 얼마나 오랜 세월 많은 사연을 가지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에 아련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옆구리를 찌르는 분 덕에 까르르 웃었지요.

탑돌이 쪽을 가기키며 저더러 ‘** 놈, ** 놈’ 기도하며 얼른 따라 돌라고 하셔서...ㅋㅋ

남해로 향한다는 것만 알았지, 경유지는 관심 밖이었기 때문에 진주성에 들르게 될 줄은 몰랐어요.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며 촉석루 앞을 거닐며 남모르게 잠깐씩 잠깐씩 사색에 잠겼습니다.

잔뜩 쑤셔 넣은 트렁크가 무안하거나말거나 혼자 남으려던 애초의 계획을 수정한 건, 어쩐지 남녘의 봄기운이 나로 하여금 뭔가 즉흥적인 일을 벌이게 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어요.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차안에 울려 퍼지던 저의 재잘거림은 그리움을 등 뒤로 밀치고 밀쳐내는 소리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늘 그렇듯이 여행은 하는 동안에도 즐겁지만, 떠나기 전에 준비하면서 갖는 설렘과 돌아온 후에 반추하면서 갖는 흐뭇함 또한 크지요.

관계와 거리에 변화를 주기도 하고요.

서먹했던 사람과는 편해지기도 하고, 친한 사람과는 더욱 친밀해지기도 하고....

나쁘지 않게 표현하면 포커페이스에 강하고, 나쁘게 표현하면 가식결정체인 제가 여행을 통해 베일을 한 꺼풀 벗자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생겨서 좋았어요.

그래서 제 블로그도 오픈했지요.

저랑 비교도 안 되게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시는 선생님 블로그에 자주 들락거리며 제가 일빠 댓글쟁이가 되면서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어요.

선생님 글은 이미 정평이 나있으니 첨언해봤자 그렇고, 여타의 수식이나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고도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사모님 글의 잔잔한 감동에 제가 부부의 광팬이 되었어요.

온라인상에서 별별 얘기를 다 나누다보니 가끔 만나도 어제 본 듯, 며칠만에 봐도 아까 본 듯 그리 되더군요.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호칭도 오라버님과 언니로 바꿨고, 실제 친남매지간 못지않게 막역하게 되었어요.

혹시 저만 그럼 어쩌지요? ^^*

<2011년 2월 진주성 촉석루의 낮>

<2006년 8월 진주성 촉석루의 밤>

<남해 보리암>

<같은 장소의 다른 모습- 헬렐레 웃으면 바보 오누이 같고, 웃음이 그치면 왜 슬퍼 보이는지...>

<고마운 분들과 아이스크림 부여잡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