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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신세지며 산다는 것

 어쩌다보니 수학을 전공했지만 여고시절에는 문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 쪽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어요. 가방 속에 교과서나 참고서는 없어도 읽을 책은 꼭 몇 권씩 넣어가지고 다녔거든요. 고1때는 ‘죄와벌’ 같은 소설책을 읽었고, 고2때는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이나 니체, 사르트르, 까뮈에 매료되어 있었고, 고3때는 프로이드와 융의 저서를 섭렵했어요. (그러면서도 야구 중계는 놓치지 않고 다 봤답니다. 하필 우리나라 프로야구 출범을 저 고3때인 82년에 할 게 뭐랍니까? 제가 입학통지서를 받아들었을 때, 객관적이고도 냉철하신 울엄니께서는 너처럼 공부 안한 애가 대학에 합격한 건 우리나라 대입제도의 모순이라고 하셨다지요.^^)

 아무튼 제 독서의 특징은 읽는 걸로 끝내지 않고 그때그때 독후감을 쓴 것에 있었어요. 어느 해 방학 과제는 ‘독후감 3편 써오기’였는데, 새로 옮기기가 귀찮아서 늘 써오던 두꺼운 대학노트를 제출했더니 무슨 상을 주시더군요. 아마도 양으로 승부한 게 먹혔던 모양입니다. 부상은 까먹었고 단상에 올라갔던 기억만 어슴푸레 납니다. 글쓰기를 추천하신 몇몇 분이 계셨지만 무슨 백일장 같은 데를 나가 본 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빼어난 건 하나 없이 雜技만 雜多해서 바빴거든요.

 서른 중반에 시라 이름 붙이기도 뭣한 글을 조금 써 보기는 했지만 습작 수준이었어요. 그러다가 오라버니 블로그 글에 고무되어 저도 잡문을 조금씩 끄적거리게 됐어요. 그러면서 첫사랑은 초고로 끝내고, 다음 사랑은 마무리를 못한 상태에요. 픽션도 아닌 것이 논픽션도 아닌 것이, 재미있는 것도 아닌 것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끝도 아닌 것이 계속도 아닌 것이, 뭐 대충 그렇습니다.

 진솔한 글은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 같아서 어찌 보면 여러 번 만나는 것과 맞먹는 것 같아요. 대화는 어느 순간에 말이 삐딱선을 타기도 하고 뜬금없이 튀어나가기도 하지만, 글이란 생각을 정제하고 정제해서 가장 근사한 언어를 찾아내 표현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 글의 유일한 독자이신 바오로&아가다 부부는 제 삶의 특정 부분에 대해 친형제 이상으로 잘 아시고 조언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살다보면 가족에게는 오히려 말하기 어려운 그런 것들도 있잖아요. 그래서 수련이 시들해질만하면 오뎅을 보내고, 오뎅이 퇴비가 될 무렵이면 곶감을 보내고, 곶감이 사라졌으니 사진도안을 선물하려는 거지요.^^

 고해하는 심정으로 쓰던 글에서 제 마음 깊은 곳의 ‘오두막’을 만나게 되고 이후에 묘한 영적체험을 하게 되었어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작년 7월에 성당 예비신자반 교리공부를 시작했지요. 두 분이 신앙생활을 함께 하시는 걸 보면서 참 바람직한 부부상이란 생각을 했었고, 저 역시 종교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였거든요. 오라버니께서 가까이 두고 보시던 책 ‘단순한 기쁨(피에르신부님)’을 주셨는데 그것도 마음에 많이 와 닿았어요. 그리고 또 하나 은총이었던 것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딸도 함께 성당을 다니게 되었어요. 그냥 모든 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느님 곁에 다가가도록 두 분이 인도해주셨어요.

 지금도 미사 시간은 눈물범벅으로 시작해 눈물범벅으로 끝나기 일쑤지만 그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제 상처가 치유되면서 다른 이의 잘못도 용서하고, 제 잘못도 용서 받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지난 삶을 돌이켜봐도, 그리고 현재도, 슬프고 아픈 장면이 많지만 그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다 보면 죽는 길은 아니겠거니 하면서 기도하며 삽니다.

칠흑 같은 어둠에 혼자 버려진 느낌일 때는 성모 마리아님과 눈을 맞췄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을 때는 슬그머니 계단을 올라가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었어요. 목 놓아 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절망한 존재에게 그 자체가 위안이 되기도 하고, 어딘가 의탁할 곳이 있다는 건 고독한 존재에게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 찾아갈 곳이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지요.

 모녀 영세 받던 날은 두 분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어요. 산 넘고 강 넘고 바다 건너서는 아니고, 걸어서 버스 타고 전철 타고 선물 잔뜩 이고 지고서 평촌에서 이촌동까지 그 먼 길을 오셨어요. 황송해서 안 오셔도 된다고 된다고 사양했는데, 부득이 오신다고 오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막상 꽃다발에 성물에 사진까지 찍어주시니 모녀만 있었으면 얼마나 허전했을까 싶은 것이 정말 감사했어요.

 속세에 머무는 한, 사람은 혼자일 수 없지요. 누군가에게 신세지지 않으려는 생각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필요가 되고자 하는 마음도 별로 없는 걸지 모르겠어요. 물론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응하기는 하겠지만,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손길을 내미는 것과는 또 다르니까요. 저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 살 때는 이웃의 소중함을 잘 몰랐어요. 그런데 병들고 실수하고 부족하니 주위 분들의 위로와 격려가 큰 힘이 되더군요.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받은 은혜는 다른 또 누군가를 위해 제가 기도하는 열린 마음으로 이어지더군요.

 오라버니와 언니를 통해 가장 크게 배우는 것은 베푸는 삶입니다. 밭의 수확물 나눠주시듯 시간과 공간만 허락되면 맛있는 음식은 물론, 마음까지도 펑펑 나눠주십니다. (돈은 좀 야박하신 듯...^^) 저도 10년 후에는 퇴임하고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신세지며 살고 있으니 열심히 갚으며 살아야지요. 저보다 더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세상천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해야지요. 그렇게 사는 게 바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이겠지요.

 바오로 오라버니, 아가다 언니 사랑해요. 늘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주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주시고, 그래서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잘 넘어가고 있어요. 회갑선물로 함께 드리려 써 본 글이 하도 조잡해서 차후에 손질이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턱 없이 부족한 글이지만 제가 갖는 감사의 마음은 하늘만큼 땅 만큼인 것만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처음과 같이 항상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의 딸로 살게요. 고맙습니다.

<교리반 단체사진. 울딸이 누굴까요? 제일 먼저 맞추신 분께 금메달 달아드립니다.

  얼마 전 튜닝해서 여기 사진이랑 또 달라졌어요.^^>

어찌나 손이 거하신지 영세 받던 날, 성가족상에 성모상에 예수님상까지 한 짐 싸가지고 오셨어요.

성모님은 예수님 동생도 쩜 낳아주시지... ㅋㅋ   

<선물1. 제가 잘 앉는 자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위치에 성모님을 모셨어요.>

<선물2. 황토빛이 고운 성가족상. 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릿저릿해요.>

<선물3. 크리스탈 예수상. 울딸 책상 위에 있어요.>

<2011년 12월 3일, 바오로& 이사벨라& 아가다. 하느님의 딸로 열심히 살게요. 감사합니다~~ >

* p.s. 지난 자수일기의 정답은 '줌마'님께서 맞추셨어요.

  바가지는 옆에 아가다 언니가 들고 계셨는데 밭 매러 가는 아낙네 차림이라

  혹시나 싫어하실까봐  초상권 보호 차원에서 가려 드렸어요. ^^